05 August 2013

#1 그날

그날이 아마...10월? 11월쯤이었나? 어쨌든 해가 지고 나면 으슬으슬 쌀쌀해지는 때였어. 아, 10월이었나보다. 11월이었으면 나무에 잎이 하나도 안 남아있었을텐데, 그날 낙엽이 산처럼 쌓인 길을 사그락사그락 거리며 걸었잖아.

하여튼 그날은 금요일이었어. 대학생들의 특권이라고나 할까, 금요일 밤이면 대학생을 집중공략하느라 솔깃한 할인과 파격적인 서비스를 내세우는 유흥업소들이 많았지. 나는 원래부터 내성적인데다 성의껏 꾸며서 어둡고 청결하지 못한 곳에 가서 땀내고 돌아오는 것에 대한 귀차니즘이 넘쳐서 정말 나가기 싫었는데, 친구의 생일이라 어쩔 수가 없었던 날이었지. 한 학기를 프랑스에서 같이 고군분투한 각별한 친구인데다가, 자기주장이 강하고 옷과 화장까지 챙겨준다기에 댈 핑계가 없었지.

문제, 아니, 시발점은 친구에게 낚인 것에 있겠지. 클럽에 가게 됐는데 한참 춤을 추다 물(?)이 마음에 안 든 친구는 우리를 다시 모아 방에서 술게임을 시켰지. 원래 잘 안 낚이는데 워낙 나를 잘 아는 친구라 나를 자극하는 말만 콕콕 해서 결국 모든 게임에 참가했고, 그날따라 더럽게 운이 안 따라줘서 수없이 머리 위로 잔 탈탈이를 해야했지. 아니, 어쩌면 운이 따라줬던 건지도 몰라. 그렇게 해서 파티가 끝날 때 쯤에는 내 인생에 처음으로 만취상태였으니까.

친구들이 우리 아파트 근처에 나를 데려다주고 나는 괜찮다고, 괜찮다고, 혼자 갈 수 있다고 그들의 도움을 기분좋게 뿌리치며 내렸지. 그런데 아파트 단지까지는 어떻게 비틀비틀 걸어갔는데, 단지 안쪽 작은 공원 정자 앞에서 취기가 확 올라오더라고. 세상이 휘청휘청 하더니 어느새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아있더라고 내가. 헤롱헤롱 하는 머릿속에 나 혼자는 집에 못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손에 있던 핸드폰을 열었는데 네가 제일 먼저 떠오르더라. 술기운 특유의 무념무상으로 인한 뻔뻔함으로 너에게 전화했지.

뭐라고 정확히 말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 하지만 너에겐 내가 급한 상태로 느껴졌는지, 금방 왔던 것 같다. 아니면 내가 술에 취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 지 감지를 못한 걸까? 어쨌든 너는 숨차게 헉헉 거리면서 츄리닝 차림으로 내 옆으로 다가왔어. "뭐야? 괜찮아?"를 남발하면서.

가까이 와서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는 피식 웃더라. 내가 생각해도 웃겼을 것 같아. 금요일 밤, 토요일 새벽에 나 같은 애가 올블랙으로 차려입고 어울리지 않는 친구의 까만 가죽 자켓까지 걸치고 두 팔로 무릎을 감싸안고 흔들흔들 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으니. 나를 일으키고는 내 팔을 네 어깨에 둘렀지. 근데 네가 나보다 한참 크잖아. 허리를 굽혀서 가야하니까 힘들어서 몇 걸음 못 가고 네 허리에 내 팔을 감고 다른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아 세웠지.

조금 가서는 내가 말을 걸었잖아. 네 이름을 부르면서.

-왜?
있잖아...
-응.
너 옛날에 나 좋아했었다며?
-...
다 알아.
-...맞아.
그런데 왜 나한테 말을 안했지? 나는 너 군대 가고서야 알았잖아.
-...

너의 침묵에 나는 혼잣말을 했다지. 나는 분명 내 생각으로만 한 줄 알았는데. 정말 술이 도운 거야, 그렇지?

말했으면 너랑 사귀었을 텐데. 왜 겁쟁이처럼 말을 안해서. 내가 얼마나 미안했는데. 너 복학 하고서도 어색할까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지금도 옛날처럼 가깝게, 친하게, 편하게는 못 대하는 것 같아서 아쉽고 미안한데.
-...
아, 근데 춥네. 왜 여자들은 이쁘려고 추위를 무릅쓰고 다닐까. 건강에도 안좋은데. 아 추워.
-...
얘도 오늘 춥게 입고 왔네. 단단히 입고 다니지. 그래도 오랜만에 편하다. 아, 내가 취해서 그런가? 아참, 얘 부르면 염치없는 짓인 거였나? 아이쉬, 어지러워. 박수하처럼 독심술사가 아니여서 참 다행이야. 안그러면 지금 나 생각하는 거 다 알 것 아냐. 아, 근데 지금 몇시지...
-풉.
어, 얘가 왜 웃지? 내가 많이 비틀거리나? 아 근데 진짜 걷기 힘들어. 내가 다시는 걔 수작에 말리나 봐라. 쨌든 이번에 나갔으니 몇달동안은 클럽 안가도 되겠지? 오늘 얘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 아휴. 진작에 말해주지. 나는 좋은데. 옛날에도 좋았는데. 지금까지 날 좋아해줄 리는 없겠지? 그러면 또 말 안 하는 거 아냐? 에이 설마.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자.

이때 네가 끼익, 하고 멈춰섰지. 나도 갑작스러움에 앞으로 가다가 핑 돌아 널 마주섰었잖아.

-나, 일학년 때부터, 너 처음 보고, 너랑 처음 말하고, 너랑 처음 웃고, 너랑 처음 어깨 툭툭 거릴 때부터 널 좋아했어. 그 다음부터도 주욱, 너만 생각나더라. 군대 가서도, 군대가 너무 힘드니까 생각나더라. 그래서 제대하고는 배낭여행을 갔는데, 그래도 너만 보이더라. 낯설어서 그런거야, 하고 다시 복학했어. 너도 나도 많이 달라졌으니, 이젠 아닐거야 했어. 근데 아니야. 아직도 널 좋아해. 아직도 널 보고, 너랑 말하고 웃고 장난치고 싶어. 그때는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겁쟁이였고 소심했어. 지금 말할게. 너를 좋아해.

한참동안 우린 말 없이 그렇게 서 있었지. 나는 입을 살짝 벌리고, 멍~한 표정이었다며? 그 다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너를 무척이나 황당하게 했지. 내가 갑자기 핸드폰을 열어 뽁뽁 거리면서 네게 그랬지.

다시 말해봐, 녹음하게. 완전 멋졌어.

큭. 내가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어. 떨리는 마음으로, 긴장덩어리로 몇 년이나 꾹꾹 참아온 고백을 속사포로 쏟아냈는데. 이런 반응은... 많이 당황했을 거야, 나라도.

그래도 넌 진짜 착한 아이야. 어이 없는 표정으로였지만 더듬더듬 기억나는 대로 다시 말했잖아. 난 아직도 가끔 그 동영상 볼 때마다 킥킥거리면서 온몸으로 웃어.

하여튼 그날이었어. 내가 처음으로 술에 취할대로 취한 날, 처음으로 취중진담이란 것을 한 날, 처음으로 네게 기댄 날, 처음으로 네게 고백을 받은 날. 처음으로 너와 연애라는걸 시작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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